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 이방인 L’Etranger

뫼르소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부조리에 대해서 이해했다는 기분보다는, 오히려 후련해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뫼르소는 완결(…외에는 별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되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강했고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관된 자세는 존경 받을 만했다. 비록 죽음을 눈 앞에 두고 과격해지긴 하지만, 그것은 존재로써 가장 두려운 일-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확신을 갖기 위한 선언 행위였다.

뫼르소를 오직 개아(個我)의 화신 같은 사람이라고 해서 비난 할 수 있을까. 집단에 적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부도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사회의 관념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저 부조리한 사람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진정한 개아는, 집단의 도덕조차 초월하는 완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증오심을 가지고 응수한다. 결국 네 멋대로 하자는 거지 않는가, 뫼르소는 결국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가. 네 가족이 뫼르소에게 죽음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가, 라고.

하지만 보라. 그들이 믿었던 대로 보통 사람들은 항상 피해자이고 뫼르소는 가해자였던가? 뫼르소야말로 충분치 못한 이유로 -실제로 그의 살인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한 보통의 사람들 집단에 의해 죽었다.

집단의 규율과 도덕을 절대적이라 믿고 어느 정도는 집단과 타협해야 한다는 이들이 뫼르소가 사람을 죽였다며 분노하기만 할 뿐이라면, 그들은 영원히 스스로 뫼르소가 되어 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완벽한 개아의, 그래서 끝까지 일관성을 지키며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진정으로 행복했던 뫼르소를 말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뫼르소와 같았다면 살인이 일어났을까. 살인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뫼르소와 집단의 마찰, 우주적 질서와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과의 마찰, 그것뿐이다.

뫼르소가 성취한 완벽에 가까운 개아라는 것은, 이기적인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아니, 오히려 반대이다. 이기적인 사람이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위할 줄 모른다면, 뫼르소는 기꺼이 친구를 위해 귀찮은 일도 했고 타인을 호감을 얻고 싶어하기도 했다. 이기적인 것이 자신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완벽한 개아는 완전히 자신을 잊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이 집단을 만든다. 약간의 희생으로 더 큰 집단적 이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뫼르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존재로서는 당연한, 삶에 관한 욕망 –섹스, 해수욕- 외에는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이기적인 욕구가 없었던 뫼르소는 진정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자의식이 발달하지 못한 상태와 비슷한 뫼르소는 –발달했다가 사라진 것 같지만- 그래서 독립된 존재 의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관계 자체에만 주목했다.

자신이 부양해야 하는 어머니와의 관계, 마리와는 자신과 섹스를 나누고 같이 있으면 즐거운 관계, 자신에게 잘해주는 친구 레몽과의 관계, 식당 주인과의 관계, 그리고 식당에서 본 자동 인형과도 같은 여자를 재미있어 하는 관계. 사랑한다거나, 그래서 결혼해 준다거나, 믿는다거나, 나를 발전시켜 준다거나 하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가치와는 달랐다.

뫼르소는 감정이 없지 않았다. 무기력하고 삶에 애착이 없는 감정 결핍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뫼르소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데에 의미를 두었을 뿐이다.

그가 친구의 사건에 휘말려서 아랍인을 쏘아 죽일 때, 뫼르소는 샘 가의 그늘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랍인은 칼을 들고 있었지만, 그와는 대화로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랍인의 행동에 따라 싸우느냐 대화를 하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갔을 때, 태양은 뫼르소의 머리에서 작렬했고, 단검에 눈이 부셨다. 그리고 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랍인의 행동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쏘았을 뿐이다.

뫼르소에겐 총을 쏜다는 것은 어떻게 되든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한발을 쏘고, 잠시 쉰 다음 네 발을 쏘았다. 모든 행동의 배후에는 반드시 의도가 있고, 그것을 파악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들로써는 뫼르소가 정당 방위였는지, 원래가 악한 놈이라 죽일 의도를 가지고 확인 사살한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그래서 뫼르소의 행동을 분석하고 서로를 연관시키기만 했다. 아마도 그들은 뫼르소가 이렇게 사회적이지 못하게 된 건 어떤 사건 때문일 거라고 믿고, 그들이 모르는 어떤 사건과 또 연관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뫼르소에게는 모든 사건은 그 순간으로만 있을 뿐이며, 그것들이 휘발성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순간으로만 상황을 받아들이는 뫼르소로써는 당연히 감옥도 금방 적응했다. 판사와 변호사와의 관계도 그 관계 자체로 순수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랍인을 죽여야만 했을 필연적인 의도를 묻자, 뫼르소는 대답한다. 태양 때문에. 이 소설에서 가장 통쾌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집단적 가치관을 일소에 부정하고 자신에게 충실한 이 솔직한 답변은 뫼르소란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가장 결정적이 아닌가. 사람들은 큰소리로 비웃지만 뫼르소는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의연했다. 뫼르소가 변명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집단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이해시키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사형을 선고 받지만, 그것은 집단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많은 수의, 저 근엄한 척 했던 집단의 도덕이, 뫼르소에 의해 무의미해지고 우스워지는 그 희열의 순간을, 난 정말 좋아한다.

죽음이 확정되자, 뫼르소는 자유와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헛된 욕망은 괴로움을 준다는 것을 알기에, 뫼르소는 처음엔 무죄 석방에 대해선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새벽과, 목숨을 조금 연장할 수 있는 상고를 단념하는 순간, 무죄 석방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새벽과 상고를 단념했기 때문에 그 무죄 석방이란 단어는 더 이상 상실된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는 아무래도 좋다.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뫼르소는 마지막까지 삶의 애착을 버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확신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식으로 두려움을 극복한다면, 뫼르소는 마지막에 가장 강력하게, 기쁨과 분노에 싸여 사제의 멱살을 잡고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확신한다.

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자신의 삶의 연장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행복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그에겐 마지막 도약과 초월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가 없듯이, 뫼르소가 죽는다고 해서 이 소설이 슬픈 배드 엔딩이라 결론지을 권리도 없는 것이다.

200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