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동굴

내게 일어난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스스로도 꿈이 아닐까 의심하곤 했다. 그러나 난 분명히 일어난 일이라고 판단했다. 내 눈에 생긴 비문증과 고립된 내 자신이 그 증거이다. 지금껏 고립되어 있는 난, 이 사건을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었기에 결국 글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당시의 내 선택이 옳았던 것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하지만 이걸 읽은 이가 만약 나와 같은 선택을 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부디 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2003. 9.

*비문증 : 안구의 유리체 속에 떠다니는 운동성 부유물로 인해 눈앞에 무언가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다. 날파리증이라 불리기도 한다.

1. 동굴.

눈을 떠 보니 밤이었다. 축축한 공기가 무거웠다. 입안에선 흙이 씹혔고 땅바닥에 누워있었기 때문인지 온 몸이 뻐근했다. 여긴 어디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날 둘러싼 검은 벽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득 밤이라서 어두웠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뒤는 막다른 벽이었고, 내 앞으로 시커먼 어둠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동굴?”

동굴이었다. 동굴의 제일 깊은 곳에 있는 듯 했다. 그때 끙,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또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조금 벗겨진 중년의 사내였다. 난 숨죽여 그를 관찰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태도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은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가 황급히 나를 피하려고 물러앉는다는 것이 뒤에 있던 다른 사람을 건드려 깨우는 결과를 낳았다. 남자가 건드린 이는 짜증스러운 듯이 몸을 뒤척이다가 잠시 후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당신들 누구야!”

젊은 여자였다.

그러는 아가씨는 누군데?”

안경잡이 사내가 억울하다는 대답했다.

다들 빚이라도 걸까? 누군가에게 원한 살 만한 짓을 한 걸까?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하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누구지?”

바깥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내가 바깥에서 살았음을 증명할 만한 구체적인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엔 어쩌다 갇히게 된 줄 알았지만 그것조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바깥에서 살기는 했던가? 아니, 바깥이란 것이 있기는 한 건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여자와 안경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여자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억 상실증이 아닐까요.”

“우리 둘 다 동시에요?”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러고보니 바깥세상이 어떨지 그냥 알고 있다는 점이 이상한데? 나와 바깥의 관계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심지어 이 두 명도 증명해 줄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어쩌면 원래 동굴 안에서만 살고 있었는데 바깥에서 사는 꿈을 꾸다가 깬 걸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부터 바깥 따윈 없었던 거다. 바깥이라는 허구의 세상을 열망하는 천성을 가지고 막 태어난 동굴 속 생명체인지도 모르잖아. 어쨌든 뭐든 상관없다.

난 그런 식으로 이 상황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무기력해졌다. 어쩐지 이런 무기력은 매우 익숙한 느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거기, 거기 누구야?”

저 편의 어둠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형체가 다가왔다. 점차 건장해 보이는 남자와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 나타난 남자의 팔뚝은 티셔츠 안에서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있었다.

남자에게 끌려오다시피 하고 있는 여자 쪽은, 뭐랄까, 처음엔 구멍인 줄 알았다. 슬립 차림이라 살갗이 거의 드러나 있는데, 어찌나 하얀지 동굴 벽에 구멍이라도 뚫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아닐까 착각했기 때문이다.

안경은 우리 쪽의 대표인 양 나서서 저 쪽의 대표인 듯 구는 팔뚝과 대화를 나누었다. 팔뚝과 안경은 단지 몇 마디의 말로 우리들이 같은 처지에 놓인 비슷한 부류라고 결론을 내렸다. 팔뚝에게 이끌려 온 여자는 나를 보더니 남자의 팔뚝을 뿌리치고는 내게 다가왔다.

“다행이다.”

그뿐이었다. 하얀 여자는 이번엔 내 팔을 잡았다. 팔뚝은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흘긋 쳐다봤다.

“주변을 좀 확인해봐야겠어요.”

훌쩍거리던 젊은 여자는 냉정을 되찾고 똑똑 부러지듯 말했다. 눈물을 훔치며 야무지게 일어선 여자는 주변에 단서라도 떨어져 있다고 믿는 듯 어두운 구석구석을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절망도 맹렬하게 하는 것 같더니 희망도 맹렬하게 찾는다.

난 무기력하게 동굴 벽에 기대어 앉아 그 여자를 따라 주변을 탐색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배낭이 있네!”

안경이 외쳤다.

“여기도. 아, 여기도!”

“열어보라고!”

똑똑한 여자와 팔뚝도 연달아 외쳤다. 이들은 부산스럽게 배낭 안에 든 것을 확인하는 작업을 펼쳤다.

“쇠고기 통조림 다섯 개, 야채 통조림 두 개, 통조림 따개, 라이터 한 개, 손전등 하나…….”

팔뚝이 품목을 확인할 때마다 다른 이들도 각자 배낭에서 똑같은 것을 찾아냈다. 팔뚝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이곳에 가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과도였다. 과도를 써야할 만한 식재료는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함께 역경을 극복해 나갈 동료처럼 굴던 이들은 과도를 쥔 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모든 것이 계산된 것이라면 무기도 이유 없이 들어 있진 않다고 생각한 걸까. 이중에 누군가가 스파이일지도 모르지. 아무도 먼저 칼을 내려놓지 않고 팽팽하게 긴장만 하고 있었다. 무기도 없이 혼자 구석에 기대어 있는 나 따위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난 저 긴장감 속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그 상황을 종식시킨 건 박쥐들이었다. 박쥐 몇 마리가 천장 구멍에서 푸득거리자 다들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이다. 박쥐들이 잠잠해지자 팔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동굴 안에 박쥐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로 무기가 있어야 했던 이유가 설명되었다. 모두들 애써 긍정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일단 출구를 찾아보죠.”

팔뚝이 자주적인 태도로 선언했다. 나를 뺀 모두가 절실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바깥에 살았던 기억이 없다. 어째서 바깥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거지? 게다가 저 배낭들이 우리 몫이라고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를 뺀 남자 둘과 여자 둘은 지극히 당연한 듯 이 배낭이 하나씩 자기의 몫이라 믿는 듯 했다.

이들은 스스로 출구를 찾겠다는 결심을 한 거라 믿겠지만 난 이들이 배낭과 손전등, 그리고 과도를 발견한 순간 본격적으로 조종당하기 시작했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너도 도와. 함께 움직여야지.”

팔뚝이 내게 강압적인 말투로 말하며 내 앞에 내 몫의 배낭을 던졌다. 난 주저했다. 출구를 찾아 나설 의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역시 굶어 죽겠지. 하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도 없지 않느냔 말이다. 왜 적극적으로 발버둥 쳐야만 하지? 왜 내가 저 집단에 포함되어야 하지? 난 우리가 동굴이 무너져 출구를 찾아 헤매다 죽은 지박령일지도 모른다는 좀 엉뚱한 상상까지 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와 같이 가줘요.”

하얀 여자가 배낭을 메고 내게 다가와 애원하는 말투로 속삭였다. 난 결국 팔뚝과 똑똑한 여자, 안경잡이의 못마땅한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어째서인지 하얀 여자의 부탁은 거절하기 어려웠다.

일어서고 나서야 내 한쪽 다리가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모양부터가 조금 뒤틀려 있는 것이 내가 먼저 눈치 못 챈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게다가 난 여자들과 비슷한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이들이 처음 만났을 때 빼고는 나를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난 남을 위협할 만한 조건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얀 여자는 내가 자신을 어떻게 하지도 못할 뿐더러 자기를 돌봐주는 소위 하인이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배낭이 하나 남는군요.”

내 앞에 던져진 배낭을 집으려던 난 무심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모두들 내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배낭이 하나 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우리는 다섯 명인데, 배낭은 총 여섯 개였다.

난 물었다.

“한 명이 더 있는 걸까요?”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졌다. 배낭이 여섯 개란 건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저히 의도된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서 주인 없는 배낭은 무척이나 불길한 것이었다. 난 절룩거리며 새 배낭을 끌어왔다.

“뭐하는 거야?”

팔뚝이 시비 걸 듯 물었다. 난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주인이 없는 배낭에 든 식량을 다섯으로 나눠볼까 하고요.”

이들은 내가 버릴 것과 가져갈 것을 분류하는 동안 보고만 있었다.

“과도는 버리지 마. 내가 가져갈테니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팔뚝이 명령했다.

“왜요?”

똑똑한 여자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안경도 여자의 말을 받았다.

“칼을 두 개 가지려는 이유가 있는 건가?”

팔뚝이 과도를 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모두들 거기에 집착하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그냥 버리고 가면 안 돼요?”

하얀 여자는 안절부절 하다가 큰 소리를 냈다. 모두들 하얀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부드럽게 덧붙였다.

“칼이 두 개 있다고 해서 싸움을 더 잘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팔뚝은 간신히 수긍했다. 모두들 조용히 자기 몫의 물건들을 배낭에 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팔뚝은 생각을 고쳐먹었는지 침착한 말투로 연설하듯 말했다.

“우리가 예민해져 있던 모양입니다. 합심하지 않으면 이 곳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뿐입니다. 우린 서로 도와야 해요.”

이들은 뉘우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팔뚝은 더더욱 자신감 있는 태도로 계속해서 말했다.

“손전등은 모두 여섯 개가 있습니다. 그 중 켜지는 것은 다섯 개 입니다. 한꺼번에 켜면 낭비니까, 한 사람이 손전등 하나만 들고 앞장서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르면서 갑시다. 손전등을 다 쓰면 다른 것으로 교체하고요.”

“누가 앞장서죠?”

똑똑한 여자가 물었다. 팔뚝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제가 앞장서죠.”

손전등 다섯 개를 다 쓰고 먹을 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출구를 찾아야 하는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다들 초조해보였다. 그러나 난 어서 내 힘으로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편해지고 싶을 뿐이었다. 나 같이 의지박약한 자는 어차피 그 어떤 것도 끝까지 해내지 못할 테니까.

“우리가 나갈 수 있을까요?”

하얀 여자는 나한테 속삭이듯 물었다.

“반드시 나가야지. 희망을 버리는 순간 죽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으로 헤쳐 나가야 돼요.”

나대신 안경이 왠지 도취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숱한 역경을 극복해 보신 것 같아요. 연륜이 느껴져요. 어디 중소기업 사장님이 아니었을까요?”

똑똑한 여자가 안경에게 말했다. 안경은 벌쭉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가씨는 젊고 영리하니 분명 명문대 학생일 거야. 여기서 죽긴 아까우니까 꼭 나가야지.”

나는 뭐로 보여요?”

대화가 흥미로웠는지 앞서가며 팔뚝이 물었다. 기대에 목소리였다.

나가는 운동선수, 아니면 강력반 형사일까요? 언니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사는 미시족.”

*미시족 : 결혼을 했으나,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성과 같은 차림으로 다니는 여성들을 이르는 말, 과거의 신조어

명문대 대학생일지도 모르는 똑똑한 여자가 팔뚝과 하얀 여자에게 각각의 지위를 부여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내 옆의 하얀 여자를 바라보았다. 미소 띤 표정을 짓는 걸로 보아 배당된 역할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랑스러웠다. 미시족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 상상했다. 적어도 같은 놈은 아니겠지.

이들의 스스로 부여한 지위는 그대로 사실이 되었다. 자신과 나머지 네 명만 믿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이렇게 여대생에게 질문하는 안경잡이 사장님의 목소리엔 짓궂은 즐거움이 있었다. 날 놀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사장님의 질문을 듣고서야 난 내가 청년으로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대생은 사장님의 질문에 못 들은 척 대답하지 않았다.

2. 계급.

동굴은 한 방향으로 지루하게 뚫려있었다. 공기는 무척 습해서 벽엔 물기가 촉촉했다. 쉬기도 할 겸 첫 식사를 하기 위해 둘러앉은 이들은 통조림을 어디까지 먹어도 될지 토론했다. 그러나 난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식욕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몫을 이들에게 나눠주자, 이들은 반색하다가 표정을 정돈했다.

동굴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너무 무서워요.”

여대생이 통조림 물로 입술을 축이며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 뭐가 나오든 내가 때려잡을 테니까.”

형사가 호언장담했다. 여자들은 물론 사장님까지 그의 호전적인 말에 안도를 하는 같았다. 난 안도하지 못했다. 뭔가 나온다는 생각만 해도 압박감을 느꼈다. 일일이 놀라고 두려워하는 건, 이렇게 생각하니 우습지만, 귀찮기 때문이었다. 난 격렬한 감정의 기복을 느끼는 것이 귀찮았다.

귀신이 있다고 믿어요?”

내가 묻자 형사와 사장님은 나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여대생은 잘라 말했다.

눈으로 믿어요.”

그딴 소리 하지 ! 그래도 여자분들 불안해하고 있는데.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어느샌가 여대생과 형사가 앉은 자리는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형사는 여대생을 돌봐주는 척하며 여대생의 손을 슬쩍 잡았다. 여대생도 뿌리치지 않았다.

“아, 어지러워.”

조용하던 사장님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장님, 괜찮습니까?”

“습해서 그런지 숨쉬기가 좀 힘들어서.”

사장님을 벽에 기대 앉게 한 뒤 형사는 선언했다.

“더 이상 강행군은 무리에요. 여기서 좀 쉬다 갑시다. 괜찮죠, 모두들?”

이들은 형사의 리더쉽에 신뢰하는 눈빛을 보내며 동의했다. 나 역시 반가웠다. 불편한 다리가 찌르는 듯 욱신거릴 때마다 혼자 편안히 남지 못한 것이 계속 아쉽던 참이었다.

“교대로 보초를 서죠. 한 사람만 깨어서 지키고 좀 잡시다.”

“한 사람이 얼마나 지켜야 하죠? 시계가 없잖아요.”

여대생이 묻자 이들은 난처해졌다.

“잠이 올 때까지는 어떨까요?”

“공평하지 못해.”

미시족이 말했지만 모두에 의해 거절당했다. 난 빨리 쉬고 싶어서 끼어들었다.

“저기,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게 어쨌다고?”

강력반 형사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렇지, 물을 받을 수 있겠다.”

미시족이 알아듣고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는 나를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배낭이 하나 더 있다는 걸 말해줬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지.

찾아보니 근처 천장의 종유석을 타고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컵을 받쳐두면 시계로 쓸 수 있겠네요.”

“그럴 듯하네. 그럼 제가 먼저 지키죠, 한 컵 꽉 채울 때까지.”

강력반 형사의 말이 모두들 바닥에 누웠다. 미시족은 내 옆에 바짝 다가왔다. 난 이 여자가 내게 뭘 원하는지 아직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불안해서 잠이 안 와요. 어깨 좀 안아 줄래요?”

미시족의 요구에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제법 기뻤다. 미시족은 곧 내 팔 안에서 잠들었지만 난 잠들 수가 없었다. 불편한 다리가 더욱 아파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욱신욱신 찌르는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누그러들지 않았고, 덕분에 잠이 완전히 깨 버렸다. 불침번을 서던 강력반 형사는 조용해지자 누운 여대생 옆으로 다가앉았다. 그가 쓰다듬자 여대생도 깨는 것 같았다. 그가 뭘 할지 알고 있었다. 가벼운 신음소리와 키스소리가 들려왔다.

“네 차례야. 일어나.”

형사가 날 깨웠다. 다리의 통증이 가라앉으면서 나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조심조심 미시족을 안은 팔을 풀고 일어나 앉았다.

“흥, 꽤 버티네, 병신이.”

형사는 비웃었다.

“여자들한테 불침번을 시키긴 좀 그렇고, 사장님은 몸이 불편하신 것 같으니까 네가 물을 네 컵 받아.”

그는 내게 명령했다. 난 말없이 동의했다. 형사는 나의 복종에 만족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바깥에 나간다면, 나만 쓸모없는 인맥일 것이다.

혼자 깨어있자니 양쪽의 어둠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그렇게 얼마나 나 혼자서의 적막을 견뎠을까,

“으흐흐흐흑, 그윽, 흐흐흐흐흐흐흑.”

여자의 울음소리가 동굴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 버리지 마……”

여대생이었다. 여대생은 흐느끼며 애끓는 목소리로 ‘버리지 마‘를 반복했다. 그 바람에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왜 그래, 응? 일어나 봐.”

강력반 형사가 여대생을 흔들어 깨웠다. 여대생은 잠이 깨서도 서럽게 울어대서, 형사가 품에 안고 달래야 했다.

“괜찮아, 안 버릴 테니까, 괜찮아. 내가 꼭 데리고 나갈 거야.”

“안 좋은 꿈을 꿨나 보네.”

사장님이 혀를 찼다.

“나도 꿈을 꿨어요.”

미시족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난 조용히 미시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남편에게 무자비하게 맞는 꿈이었어요.”

미시족은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정말 무서운 건, 그게 바로 현실일 것 같다는 거예요. 꿈이 아니라, 기억 같았다고요. 혹시 내가 그런 현실이 싫어서 여기로 도망쳐왔던 건 아니었을까요?”

미시족은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어쩐지 당신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왜 여기 들어오게 되었는지도 말이에요. 당신은 항상 침착했어요. 겁에 질려 갈팡질팡하는 우리완 다르게요. 당신은 길잡이 역할인 게 분명해요. 난 알 수 있어요.”

이 여자는 내가 그저 무기력했을 뿐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쓸모없고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좀 더 숨겨보기로 했다.

3. 갈림길.

이들은 걸어온 거리가 늘어날수록 변해갔다. 난 계속해서 먹는 둥 마는 둥, 내 몫의 통조림을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덕분에 현기증이 나고, 숨이 가빠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나 스스로도 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도 가끔 생각했지만, 이들은 나보다도 더 나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다만 고통스러울 것이 싫었다. 죽을 만큼의 아픔을 견디겠다는, 이른바 다른 종류의 결심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귀찮다 여겨졌다.

“이런, 두 갈래 길이야.”

낭패라는 듯이 형사가 말했다.

“어디로 가지?”

이곳에서 형사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선택의 책임을 지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양이었다. 갈래 길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초조하게 흘렀다.

“어디로 갈까?”

결국 형사는 내게 물었다.

“오른쪽.”

생각 없이 대답했다.

좋아, 오른쪽. 우리가 못나가게 되면 책임이야.”

형사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4. 소리.

이윽고 손전등을 한 번 갈았다. 갈림길은 또 발견되고, 또 발견되었다. 한 길로만 되어 있었는데 여러 갈래 중 하나로 나올 때도 있었다.

슬슬 형사는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불만의 뜻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갈림길에 닥칠 때마다 이들은 심사숙고하지 않는 나를 증오하는 눈으로 노려보면서, 내가 선택해주길 기다렸다. 미시족만은 여전히 나를 신뢰하는 것 같았지만.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한참 말이 없던 여대생이, 예민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를 뺀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동굴엔 우리 말고 다른 누가 있어요!”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덧붙였다. “저기 봐! 빈 캔이!”

형사가 손전등의 불빛을 앞쪽의 한 곳에 고정시키더니 외쳤다. 다 먹고 버린 통조림이었다. 이들은 잠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청히 서 있었다.

한참이나 이를 갈고,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구기던 형사는, 마침내 분노를 터뜨리며, 내게 주먹을 날렸다.

“이 병신 자식아!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잖아!”

난, 충격에 바닥으로 쓰러졌다. 코피가 터지고, 입술 한 쪽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형사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들어본 적 없는 온갖 종류의 욕설을 퍼부으며, 내게 반복해서 발길질을 해댔다. 난 반항도 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 안절부절하던 미시족이 용기를 내어 형사의 팔뚝을 잡고서야 겨우 형사는 진정했다.

“그런데 이 캔은…….”

여대생이 입을 열었다. 어조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형사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엄청나게 녹슬어 있어요, 오래된 것이라고요. 우리 것이 아니에요!”

형사는 털썩 주저앉았다. 모두들 그를 따라 무너져 내렸다.

“정말로 우리만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아까부터 대체 저건 뭐야?!”

구석에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으흐흑, 저것 좀 치워줘요!”

미시족이 겁에 질려, 북받치는 울음소릴 내며 내게 달라붙었다.

엎드려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난,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일어나 앉아, 얼굴과 상체의 흙을 털어냈다. 다행히 같은 장소란 혐의는 벗어난 모양이었다.

“가서 확인해 봐, 이 새끼야!”

난 형사의 명령에 따라 하얀 것을 살펴보러 갔다. 이들은 해골 따위를 상상하는 걸까, 누군가 갇혀서, 결국 출구를 못 찾고 죽은 이의.

그것은 하얀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배낭 밑에 까는 받침의 일부였다. 내가 그것을 확인시켜주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먹은 캔도 아니고, 더더구나 우린 이런 것을 버리지도 않았으니 분명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죽었을까, 살았을까? 우리 이전에 갇히게 된 사람들일까?”

상황이 진정되자, 이들은 조용조용 토론했다.

“만약 우리가 들은 소리가, 이 놈이 내는 거라면,”

형사가 빈 캔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여기서 얼마나 있었던 걸까? 먹을 것도 없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지?”

이들은 다시 짓눌리듯, 침묵했다. 이들의 생각을 알 것 같았다. 이들은 입으로 꺼내기조차 두려운 것이었다. 말로 하게 되면,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고하는 것 같을 테니까.

“동료를, 먹은 걸까?”

결국 긴장을 견디지 못한 여대생이,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어! 무슨 그런 끔찍한!”

미시족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난 서로에 대한 의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이제 이들의 식량을 운반해주는 운반책이 아니라, 이들의 살아있는 식량 그 자체였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피, 피곤해서 예민해진 거야. 좀 자두자고.”

마침내 사장님이 입을 열자 모두들 도피하듯 그 말에 동의했다. 여대생은 냉큼 형사의 품으로 기어들어갔다. 우리가 먹기 위해 싸운다면 마지막엔 형사가 남겠지. 현명한 판단이었다.

첫 보초는 나였다. 형사는 내게 위협적인 눈빛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지만, 난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잘못했어, 용서해 줘. 때리지 마……”

잠결에 누군가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어렴풋이 잠이 깬 상태에서, 난 그것이 형사가 내는 애처로운 소리란 것을 깨달았다. 형사는 누군가에게 애원하고 있었다.

“시키는 대로 다 할게.”

형사는 비굴하게 울고 웃었다. 난 잠결에 고민했다. 형사가 운 사건에 대한 목격자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보초 서다가 잠든 걸 들키는 것도 곤란하다 생각되어, 일어나 앉기로 했다.

형사는 눈물만 철철 흘리다가, 번쩍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나와 마 주쳤다. 우린 한참이나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본 순간, 잠든 척 할 걸 후회했다. 형사는, 내게 와락 다가오더니 내 배낭을 마구 뒤져 과도를 꺼내 발치에 던졌다. 그러더니 날 구타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뭐야?”

그 소란에 사장님이 제일 먼저 깼다. 형사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이 칼을 갈고 있었어요!”

여대생과 미시족도 잠에서 깼다. 형사는 계속해서 외쳤다.

“칼 가는 소리는 그 동안 이 자식이 낸 거라고, 우릴 죽일 생각인 거야!”

모두들 잠이 확 깬 듯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모두에게 죽는구나 생각했다. 이왕이면, 고통 없이 죽었으면 했지만, 상황으로 봐서는, 이들은 난도질도 불사할 것 같았다. 끔찍한 살해방법이 여러 개 떠오르면서, 내 스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졌다.

“먹을 걸 나눠준 건 우릴 안심시키기 위해서였어?”

여대생이 외쳤다.

“혹시 모르지! 여기 아직 남아 있는 식인종 녀석과 같은 편일지도. 아니, 처음부터 그런 녀석은 없었어. 이 녀석이 다 꾸민 거라고!”

사장님도 흥분했다.

“기다려 봐요. 기다려요!”

마침내 미시족이, 내 멱살을 잡아챈 형사를 말렸다.

“우린 칼을 가는 도구가 없어요.”

형사는 내 멱살을 놓았다.

“다른 곳에서 들리는 소리를 착각한 게 아닐까요?”

미시족은 형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배려해주었다. 형사는 한동안 다른 사람들을 초조하게 둘러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더니, 급기야는 울컥하여 미시족의 뺨을 후려쳤다.형사는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외쳤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일일이 시비 걸지 말라고, 콱 죽여 버리기 전에!”

그 외침은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모두들 움찔했다. 한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이들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칼 가는 소리가 들려……”

사장님이 말했다. 모두들 부들부들 떨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우리가 지나온 뒤쪽의 어둠에서 당장 무언가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게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형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더듬더듬 상황을 수습하려했다.

“아깐 제가 흥분했던 모양입니다. 미안하게 생각해요.”

“이해해요.”

여대생이 냉큼 대답했다. 사장님도 서둘러 동의했다.

“일단 이곳을 떠나죠.”

형사가 한층 진정된 목소리로 명령했고, 모두들 거기에 복종했다. 그의 폭력의 대상이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본 이상, 다들 아주 고분고분해지고 말았다.

5. 적응.

이들은, 점점 동굴에, 적응해갔다. 이들은 습기에 무뎌졌고, 박쥐처럼 작은 소리에 민감해졌다.

마침내 난, 허기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 겨우 내 통조림을, 좀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앞이 하얘지거나, 식은땀이 나서,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뭐든 입으로 넣어서,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예전과 달리, 내가 내 몫의 통조림을 먹기 시작하자, 이들은 놀랐다. 언제부턴가, 내가 나눠줄 것까지 미리 더해서, 한 끼 분량을, 계산해온 모양이었다. 내가 한 입 한 입 먹어치울 때마다, 이들의 표정은 놀람에서 실망감으로, 그리고 점점 분노로 바뀌어갔다.

이들은 제 것을, 억울하게 도둑맞는 심정인 모양이었다. 마침내 형사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개자식아! 다 먹을 작정이야?!”

형사는 내 얼굴을 후려쳤다. 난 얼결에 고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초라한 고기가 바닥에 떨어져, 흙과 뒤섞인 것을 본 형사는, 더욱 광포해졌다. 그의 눈에서, 마치 짐승처럼, 푸른 불이 뚝뚝 떨어졌다.

사장님과 여대생, 미시족은 우우 달려들어, 내가 떨어뜨린 것을 다시 주워 담느라 정신이 없었고, 형사는 반항도 하지 않는 날, 무차별로, 짓밟기 시작했다.

왜 주다가 안주는 거야! 빌어먹을 새끼가!”

난 내 몫의 음식을 먹기 위해서, 난 다른 사람들의 짐을, 모두 져야 했다. 빈 캔이 발견되어 기분이 나쁠 때마다, 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아니면 때때로 그냥, 형사는 습관적으로 날 패기 시작했고, 난, 서서히, 맞는 것에도, 적응했다.

맞아서 형편없는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들의 짐을, 모두 짊어진 채, 고통스럽게 한 걸음, 또 한 걸음의, 살아남는 대가를, 견뎠, 다.

6. 꿈.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도 난 동굴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나 말곤 아무도 없었다. 내 옆에 사진이 한 장 떨어져 있었다. 가족 사진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큰딸과 큰아들, 그리고 아직 어린애인 막내가 찍혀 있었다. 난 그 사진의 큰아들이었다.

“내 가족사진? 나한테 가족이 있었나?”

이상한 점은, 나 빼고 모두의 얼굴이 둥그렇게 뚫려 있다는 것이었다.

퍽, 퍽.

어둠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퍽, 퍽, 익숙한 소리였다. 누군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리나는 쪽으로 다가가보자, 희미하게 누군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등지고 서서 삽질을 하고 있었다.

“아!”

몰래 다가가던 난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세 개의 무덤이 있었다. 그는 네 번째의 무덤을 파고 있는 중이었다.

“이럴 수가!”

가까이 가 보니, 무덤 앞에 세운 막대기마다 조그만 얼굴 사진이 붙어있었다. 다른 사진에서 얼굴만 오려 낸 것이었다. 그 구멍은 내가 주운 가족사진의 그것과 크기가 일치했다.

“내 가족의 무덤이었어?!”

난 조금 망설이다 가족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가까이 들이댔다.

“말도 안 돼…”

후닥닥 다른 무덤의 사진들도 확인했다. 세 번째 무덤의 얼굴까지 확인하고 나서 주저앉았다. 아무리 보아도 사장님, 미시족, 여대생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등 돌린 남자는 묵묵히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의 발치엔 피범벅이 된 과도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당신이 죽였어?”

떨리는 목소리로 등 돌린 이에게 물었다.

“그래. 모두 다.”

등 돌린 이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내가 망연자실해 있는 틈에 그는 고깃덩어리처럼 난자된 형사의 시체를 굴려 넣더니 막대기에 아직 어린애인 막내의 사진을 붙였다.

“어째서? 당신 누구야?”

그는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 그의 다리는 한 쪽이 불편해 보였다. 난 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는 바로 나였다.

빌어먹을!”

잠에서, 깼다. 턱을 덜덜 떨며, 필사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엇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지를, 알아야했다.

그래, 그 가족사진부터가 문제였다. 같이 찍혀 있을 , 가족이란 증거가 없지 않은가. 내가 그냥 가족사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별안간, 머릿속엔, 어떤 가족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코올중독으로 습관적으로 가족들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 남편의 폭력과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간 어머니. 장남을 밀어주기 위해 대학을 장녀는 대학생 애인과 헤어진 걸 비관했고, 말없는 막내는 소심하여 매일 친구들에게 맞고 다녔지.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 장남은 대학 졸업 무기력한 실업자 룸펜이 됐다가,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를 하다 다리를 다친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가 딱딱 맞부딪쳤다. 지금 떠오른 이미지가, 내 가족에 대한 기억이라는 증거는 없다.

여기 누워 자고 있는 이들은, 가족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어머니인 미시족과, 자란 막내인 형사가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꿈일 뿐이다. 내가 가족들을 죽이는 따위, 한낱 꿈인 것이다.

같이 무능한 죽어야 ……”

아저씨는 구석에서 잠꼬대를 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난 애써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계속 이들하고만 지내서, 무의식중에 이들을 가족으로 엮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역겨운 내 머리통 같으니.

7. 자살.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의연하죠?”

언제부터인지, 미시족이 깨어 있었다. 미시족은 등 돌리고 앉은 내 뒤에 누운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의연한 게, 아니라, 그냥, 길들여지는, 겁니다.”

난 천천히 토막토막 대답했다. 실제로 맞은 얼굴이 부어서, 말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토막토막 끊어지고, 고통스러웠다.

“아니에요. 그렇게 말해도 뭔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저, 한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미시족은 조금, 놀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떠보듯이, 물었다.

“우리가 나갈 수 있나요?”

“그런데, 왜, 나가야 하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까?”

난 무심코, 드디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미시족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죠? 설마 내가 말했던 꿈 이야기를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런 건, 아닙니다.”

미시족이 조금 흥분했기에, 당황해서 부인했다.

당신 이상하군요. 나가야 하냐고요? 그래도 불안한데 어째서 그런 빠지는 질문을 하죠?”

그런 , 생각한다고, 나쁠 , 없잖아요.”

변명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가, 변명해야 하는지, 이유를 없었다.

나빠요! 앞으로 나갈 것만 생각해도 모자란 판국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니.

미시족은 정말로, 화를 내고 있었다. 난 처음으로,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가야 해?’란 질문은 이들에겐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갑자기, 고립되었다는 기분을 느꼈다. 차라리 혼자였다면, 느끼지 않았을 감정이었다.

일어나, 일어나요!”

형사가 잠에서 깼는지,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들 고분고분, 그의 말에 복종했다. 이들은 형사를 중심으로 함께 살고 함께 죽는, 한 덩어리의 유기체처럼, 보였다. 미시족 역시 그런 일이 있고서도, 형사의 말을 따랐다.

미시족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형사의 폭력이었다.

사실을 깨닫는 순간 말할 없이, 비참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남에게 비추어지는 자신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했고, 형사와 같은 강한 육체가 없다는 것이, 슬퍼졌다.

내 좌절을 눈치챘는지, 미시족이, 날카롭게 외쳤다.

“당신은 우릴 망치는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었군요!”

미시족은, 내 눈빛에서 처음과는 다른 불안한 흔들림을 발견하고는, 더 이상, 내 옆에 오지 않았다. 난, 쓸모없어진 것이다.

처음에 난, 미시족이 원해서 이들과의 관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젠, 그녀가 날 원하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이들과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을 이유도, 없었다.

죽어버릴까, 적극적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어떻게 죽는 것이 빠르고 실패가 없을까, 끊임없이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나 혼자였다면, 저절로 죽을 때까지, 별 생각 없이 살았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의 동굴 속에서, 사악한 존재고, 빨리 없어지는 편이 나았다.

나갈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나갈 거라고!”

여대생이, 스스로 용기를 내려는 , 쥐어짜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일이 없다고. 용기를 가지고 한발 한발 나가다 보면, 언젠가 빛이 보일 거야.”

사장님도 불안을 쫓아내려는 , 의욕을 과장하여, 소리로 말했다. 이들이 고르는 어휘는, 마치 바깥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50가지 마인드 컨트롤’따위의 제목을 가진 책으로 내면, 잘 팔릴 듯한 것이었다.

문득, 이들이 사무치도록 증오스럽다 느껴졌다. 동굴에서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감정이었다.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욕을 가진 이들이, 끔찍하다고 느껴졌다. 목적을 열렬히 숭배하는 이들에게서, 역겨울 정도로 거부감을 느꼈다. 이들은 절대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같은 사람에 대해, 폭력적이 될 것이기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바깥에 나가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이들과 같다면, 나로선 여기 있으나, 밖에 나가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이들 속에 있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외로워졌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을 때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수와 함께 있을 , 지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이들은무조건 열심히 살아남지 않으면 된다 강요하며, 나 같은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음으로 몰아가는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둘러댔다. 여기선 고작 네 명이 날 죽음으로 몰아붙이고 있지만, 바깥에선, 몇 십억의 타인들이 날 죽음으로 몰아붙일 것이었다.

, 죽기로 결심했다.

그냥 살아만 있는 것도, 내겐 허용되지 않았다. 치열하게 앞만 보며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야했다.

하지만 내가 죽기를 원하는 이들도, 손으로 죽일 용기는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하니까. 모두 죽은 이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하니까. 그러니, 아무리 기다려봐야, 직접 손을 더럽히는 수고를 가며, 죽여주진 않을 것이다.

이들이 죽음을 모르길 원했다. 그들에겐 삶이 절대적인만큼, 죽음에도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것이기에, 일상적인 죽음을 소란하게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아무 통로나 하나 골라서 달아났다. 발견되고 싶지 않았기에, 되도록 그들과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보니, 바닥에 웅덩이가 있는 곳을, 찾아낼 있었다. 박쥐들이 이곳저곳에서 푸득거렸고, 녀석들의 배설물더미가 잔뜩, 쌓여있었다. 웅덩이의 물은 미지근했다.

여기다. 난 이곳에서 죽기로 마음먹었다. 힘껏, 한번만 긋고, 물에 손목을 담가버리면, 끝이었다. 과도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자살을 실행할 결심이 드는 순간, 말할 수 없을 만큼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렇게 통쾌하게 삶을 뒤통수 쳐버릴 있다니! 환희에 떨었다.

빛이잖아.”

그때, 위로 비친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잭나이프를 움켜쥔 팔은, 아래로 힘없이 쳐졌다. 출구를, 찾아버린 것이다.

8. 탈출

빛이 반짝반짝 깨지는 물웅덩이까지 안내하자,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크게 한 구비 꺾어진 길로 빛살이 조금 스며들고 있었다. 이들은 어디서 힘이 나는지 허겁지겁 물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나갈 수 있게 됐어!”

이들은 미친 듯이 웃어대며 물웅덩이를 건너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 순간 강렬한 빛이 한꺼번에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난 한동안 눈을 감았다. 너무도 강한 빛 때문에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한 빛을 보고 나서야 내 앞의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본 구멍 뚫린 사진처럼 내 시야에 검은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이 구멍은 한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날벌레 같은 작은 구멍들은 윙윙대며 내 눈앞의 현실을 좀 먹고 있었다.

잠시 눈앞의 구멍들을 피하려고 애쓰던 나는 마침내 그것들이 너무 많이 맞아서 생긴 눈의 이상이란 것을 깨달았다.

난 구멍 뚫린 시야를 돌려 드디어 그렇게 열망하던 바깥을 찾아낸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손전등을 한 개만 쓰고 먹을 것도 많이 남아있는 상태로.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이들은 기뻐 날뛰지 않았다. 이들은 빛에 압도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마냥 서 있었다. 의아했다.

이들의 표정은 감격한 것이 아니었다. 설마했지만 그랬다. 이들은 발가벗기는 것 같은 밝음을 보자 겁을 먹은 것이다. 기억나지 않는 바깥이, 모르는 세상이 두려워진 것이다.

“나가지 않을 겁니까?”

이들은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깥에 뭐가 있는지 확인 할 수 있어요?”

미시족의 질문에 난 좁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더욱 밝아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이들은 입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한참이나 모두들 조용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장님이 눈치를 살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나가도 될까?”

난 혼자 천천히 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한 사람 정도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었다.

이제 혼자 결정해야 했다. 나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런 상황이 전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여러 번. 이 동굴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그것도 나의 선택이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사실 우리가 겁먹어 그렇지, 동굴은 안전했다고.”

사장님이 말했다.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짐승의 그릉거림이 있었다. 날카롭게 마찰하는 그 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무언가를 갈아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모두에게서 비슷한 소리가 나고 있었다. 깊은 동굴에서 서식할 법한 알려지지 않은 그런 짐승의 숨소리일 것 같았다.

“바깥이 더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압니까?”

형사가 사장님께 동의를 구하는 어조로 묻자 사장님은 맞장구쳤다.

“혹시 바깥이 전쟁 중이고, 우리가 피난 온 것이었다면?”

사장님이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들은 한마디씩 보태며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미리 꼭 그 상상력만큼 두려워했다.

나 역시 나간다면 바깥이라는 다른 세계에 또다시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매우 귀찮은 일이 될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나간다는 것은 엄청난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살보다도 더 힘든 결정일 수도 있었다. 자살은 내 의식이 날 더 이상 귀찮게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리지만 낯선 것은 매 순간 날 피곤하게 하겠지.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동굴 안에서 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바깥에 대한 기억도 없는데 지금 나가서 뭐합니까? 다 이유가 있으니 우리가 동굴에 있었겠죠. 안 그래?”

형사가 내게도 동의를 구하듯 물었다.

난 이들 다섯 명 가운데 제일 바닥이었고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내게 잃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된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쁘진 않을 것이었다.

그렇구나. 난 눈의 이상 때문에 고작 눈앞의 현실조차 그대로 볼 수가 없다. 보인다고 다 진실이 아닌데 뭘 겁낸단 말인가.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바깥세상 또한 진실이든 진실이 아니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형사의 지배를 더 필요로 했다. 어쩌면 동굴 속의 지위를 버리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아직 버리긴 아까운 카드를 쥐고 있는 이들은 꼼짝 않고 날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주저하고 있었다. 이젠 정말 남아있어도 되는 건지를 주저하는 같았다.

이들이 말하는 열심히 산다는 뜻은 열심히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뜻이던가.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주제에 매번 열심히 두려워하고 열심히 의심하며 열심히 포기하고선, 아 참으로 열심히 살았노라며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자기 구멍 안으로 도로 기어 들어갈 것이다.

구멍을 기어 나왔다.

9. 바깥.

바깥은 시끄러웠다. 넓고, 확 트여 있었다. 눈이 부셔서 뭐가 뭔지 파악할 수 없었다.

“바깥에 뭐가 있어요?”

구멍 안에서 미시족이 물었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도시 같았다. 난 무릎을 꿇고 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위험하지 않아요. 우리가 알던 바깥세상이에요.”

안에서 잠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장님이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알던 바깥세상이 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모르겠어요.”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다시 의논하는 것 같더니, 형사가 대표로 내게 외쳤다.

“너 혼자 죽기 싫으니까 우릴 끌어들이려는 거지! 우리가 속을 줄 알아?!”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난 미시족이 나오길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뭐라도 해주고 싶다는 욕망이 날 구속한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오길 원했다.

“봐요, 전 멀쩡해요. 절 믿고 나오세요.”

미시족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아니, 나가지 않을래요.”

미시족은 형사의 뒤로 숨었다. 난 신음소리를 내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동굴 입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놀라 주춤 물러섰다. 내가 보는 앞에서 동굴은 빠른 속도로 자기의 구멍을 메우며 무너져버렸다.

“괜찮아요?!”

난 입구가 막히는 그 가운데로 동굴 안을 들여다보며 외쳤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내 동굴은 처음부터 뚫려 있지도 않았다는 듯, 나와 그들을 완전히 갈라놓고 말았다.

난 한참이나 막힌 동굴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내가 이 안에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자 순간, 내 앞의 동굴은 그냥 건물의 한 담벼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멍청히 내 앞의 단단한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시멘트 벽돌 담이었다. 내가 있었던 동굴은 환상이었던가? 그럼 난 그동안 어디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안에 갇힌 그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높은 건물들과, 복잡한 교통, 그리고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이 있었다.

바쁘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도 벽을 짚고 있는 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람들 무리엔 여기저기 뻥뻥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한참을 서 있던 난, 마침내 빽빽한 사람 떼를 향해 천천히, 절뚝거리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끝-

후기

한참이나 기절한 채로 누워있던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자 꽉 막힌 동굴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이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옆에는 젊은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그들을 깨웠다.

“여기가 어디죠?”

젊은 여자가 경계하며 앙칼지게 외쳤다. 안경잡이 아저씨가 기가 막혀 눈물을 흘리자,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달래며 말했다.

“우리가 어쩌다 갇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출구를 찾아봅시다.”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여기 배낭이 있네!”

바닥에 여기저기 떨어져있는 배낭을 발견한 아저씨가 외쳤다. 그들은 배낭을 뒤져보고, 그것들을 각자 자기의 것이라 판단했다.

그들은 함께 동굴 탐사라도 왔다가, 어떠한 충격에 의해 기억을 잃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배낭이 다섯 개지? 한 명이 더 있었나?”

그들은 출구를 찾기 위해, 왔던 길로 다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