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처럼 찍는가 vs 사진처럼 그리는가” -사진, 기술복제의 예술-

저번 회에서 말씀드렸듯이, 기계시대는 비습-급가1)처럼 다가왔습니다. 세계는 기계에 매료되었지요. 기계시대는  19세기 초에 등장한 사진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봅니다. 사진은 달라진 세계의 패러다임을 상징했습니다. 원시 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회화, 조각, 문학, 음악, 연극과는 달리, 사진이야말로 ‘과학기술’이 낳은 완전히 새로운 예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옵스큐라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원래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로서, 작은 구멍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한쪽 벽면에 영상을 맺어주는 현상을 말합니다. 11세기 무렵 아랍의 과학자, 철학자들은 이미 텐트속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바깥의 영상을 비춰주는 현상을 알고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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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래와 같이 1508년, 자신의 노트에 ‘어두운 상자’로서 개념을 기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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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에는 Gemma Frisus가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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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벽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가면 반대편 벽에 뒤집힌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원리인데요, 이렇게 어두운 방은 어두운 상자로 구현되어, 18세기에 화가들을 위한 정밀묘사 장치가 되었습니다. 빛이 들어와서 상이 맺히면, 화가가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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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장치는 선형원근법에 기반한 그림을 제작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조각적 환영

과거에는 진짜처럼 그릴수록 뛰어난 그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는 신화적, 종교적인 주제라도 마치 눈 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그렸죠.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알베르티는 그의 회화론에서, 그림이란 실제를 눈앞에 보이는 대로 그대로 떠오르듯이 그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원근법에 대해 치밀하게 정리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계를 ‘조각적 환영’의 개념으로 재현하는 모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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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화가가 그림을 그리던 한 방식입니다. 화가들은 실제와 똑같이 정교하게 모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위와 같은 장치도 사용했었죠. 위와 같은 장치는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도 등장합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똑같이 그리려고 했을까요? 여기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갑니다. 그리스 시대에 등장한 이원론, 실재와 모방, 본질과 현상의 구분 말입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서양식 사고의 오래된 습관 같은 것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라는 실재가 있고, 인간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모방된 그림자 같은 세계, 즉 가짜 세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이란 모방의 모방, 시뮬라크르로써 가장 저급한 것이었죠. 그리고 이데아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순수한 이성으로써, 사유함으로써 다가갈 수 있는 것이었어요. 육체에 속한 감정에 휩쓸리거나 해선 안 됐죠. 그러다보니 감정을 고양시키는 예술은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침대의 이데아가 있고,  목수가 만드는 침대는 모방된 침대이고, 그 모방된 침대를 그리는 예술가는 인간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인 것입니다.

이원론

그 이후로 예술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해서 이루어져 왔지만 그래도 ‘예술은 재현이다’라는 믿음은 오래 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재와 가짜를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라면, 당연히 실재가 우위에 있고 모방이 그보다 못하다는 위계가 성립되게 됩니다. 그래서 실재에 가깝게 모방해야야 하죠. 실재까지는 아니지만 실재에 더 가까운 위치를 획득하려면요. 그러다보니 실재와 똑같이 모방할 수 있는 화가의 테크닉이 중요했습니다. 마치 눈 앞에 떠오른 것처럼 보이는 조각적 환영, 붓자국조차 내지 않아서 캔버스의 표면을 지우고 캔버스 뒤의 공간을 파낸 것처럼 그릴 수 있는 그런 장인의 기술이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까지 닮게 그리려고 했던 이유는 모방보다 실재가 더 높은 위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모방할 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죠. 이렇게 근대까지의 예술이 자연스럽게 원본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이렇게 원본이 갖는 힘, 그것을 벤야민은 ‘아우라’라고 했습니다.

기술복제와 아우라

이렇게 예술가의 손으로 직접 세계를 모방하는 것, 그것을 예술복제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실제 세계를 더 똑같이 모방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을 모방하는 순간에는 인간의 테크닉도, 예술적 주관도 개입될 틈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셔터만 눌렀을 뿐이고, 복제는 카메라라는 기계가 한 것입니다. 모방기술을 예술의 가치로 평가해왔는데, 이렇게 되면 예술가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기계를 예술가라고 할 수 있나? 기계는 생각이 없었는데? 게다가 사진이란 건 한 장도 아니고 여러 장을 복제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우라가 사라진 것입니다2).

그런데 벤야민은 아우라가 없는 것,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그러한 사진의 기술로서의 특징에 주목합니다. ‘미디어’로서의 사진, 즉 미디어성을 보라는 것이죠. 사진이 예술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기술이려고 할 때, 그럴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띠면서 오히려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디어 미학’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Shop Window, Tailor Dummies

위는 으젠느 앗제Jean Eugene Auguest Atget의 <Shop Window, Tailor Dummies>라는 작품입니다. 앗제는 사진을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화가에게 팔기 위한 자료라고 생각하고 건조하게 촬영했죠. 사진, 미디어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파리 구석구석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앗제는 수줍음이 많아서 안개가 낀 새벽에 주로 촬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창 흥할 때의 파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도 거의 안 나오고 안개도 낀, 아주 낯선 모습으로 찍혀 있습니다. 앗제는 일상적이고 흔한 것을 낯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벤야민은 앗제의 작품에서 이 소격, ‘낯설게 하기’라는 예술성을 발견합니다.

사진은 처음부터 대중에게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잠깐 묶여(!) 있기만 하면 서민들도 귀족이나 부자만 가질 수 있었던 초상화를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3). 사진이 대중화되는 데에는 이러한 점이 큰 매력으로 작용했죠. 사진이 대중화 되고, 점점 기술이 발전하여 노출시간이 짧아져 위 앗제의 작품처럼 순간을 기록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사진에도 촬영자의 주관을 담을 수 있다는, 지금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무엇을 어떤 순간에 찍느냐는 것은 아주 극적으로 주관을 드러낼 수 있었죠.

Magrant Mother, Nipomo, California

도로시 랭Dorothea Lange의 <이주민 어머니Magrant Mother, Nipomo, California>는 이주민 여성의 삶을 잡아내었습니다. 베르메르의 우아한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비교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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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종군 사진기자로 유명한 로버트 카파가 스페인 내란에서 찍은 <어느 병사의 죽음>입니다. 이전까지 전쟁에는 약간의 로맨틱함이랄까, 하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멋진 항공기 조종사의 모습,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병사들, 그런 사진이 실렸죠. 하지만 그것은 진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카파의 이 사진으로 진짜 전쟁의 모습을 보았죠. 카파의 사진은 반전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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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회고발적인 시선으로, 그러나 진정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진, 그것을 르포르타주라고 합니다. 르뽀라고 줄여 부르기도 하죠.

또한 사진은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예술로서만이 아니라, 회화와는 다른 독자적인 시각 예술의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인화지 위에 물체를 직접 올려놓고 인화하는 포토그램이나 사진 필름을 서로 조립하여 인화하는 포토몽타주가 그 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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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레이Man Ray의 포토그램 작품입니다. 흑백 실루엣의 강한 인상의 시각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죠.

이렇게 사진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기계시대를 여는 것과 동시에, 미디어 아트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것입니다.

1)WOW 도적의 은신 습격 스킬. 크리가 크게 터진다고 합니다.

도적요즘은 비습-급가가 최고라고 하네요, 무륭개(@letrec)님이.

2)초기 사진에는 아우라가 있었다고 봅니다. 필름을 가지고 종이에 여러 장 현상하는 것이 아니라, 은판에 단 한 장 인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마치 초상화를 그리는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노출해야만 천천히 인화가 되었죠. 유일물이자 초상화와 같은 아우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3)노출시간이 길어서 수십분을 카메라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머리 받침대가 필요했다고 하죠.

참고 사이트

1)http://www.kcpm.or.kr 한국 카메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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