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은 진공 속에서는 기능할 수 없다.

기술에 대해 알 거 없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란 말이야!

저는 주로 디지털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을 합니다. 이런 일은 보통 기획 쪽에서 먼저 큰 밑그림을 그려야 하죠. 일단 밑그림이 나오면 모든 파트가 그것을 가지고 수정하고 변형하고 살을 붙이고 반대로 뒤집곤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밑그림을 그릴 땐 최대한 정보를 많이 수집하려고 합니다. 기존 콘텐츠의 리서치나, 산업 현황, 이런 것도 물론 하지만 제가 가장 많이 이해하려고 하는 분야는 최후에 이 콘텐츠를 어떻게든 작동하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기술’ 분야입니다.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로 예를 들어볼께요.

‘도구를 쓰는 동물’ 이라는 개념을 잡아 계획을 세우고 밑그림을 점점 구체화시켜나가는 것은 기획의 주된 업무입니다. 이것을 기획의 방향에 맞게 뼈나 근육의 개념도 만들고 손가락도 다는 등의 기능적인 디자인은 물론, 미적인 감각까지 더하여 외형을 시각화하여 ‘원빈’이라는 작품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디자인 쪽의 업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제로 ‘작동’시켜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기술 분야인 것이죠. 물론 크게 이 세 분야의 공정은 예를 들면 저런 느낌이란 것이며, 또한 서로의 업무가 칼로 자르듯 나뉘어지지도 않습니다. 여튼 이렇게 작업을 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첫 단계의 기획을 하기 위해서는 시각화 단계 뿐 아니라, 마지막 단계인 기술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작업하고, 어떤 식으로 구현할 것이며, 한계는 무엇이고, 그 동안 테스트 해 본 것은 어떤 방향이었으며…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가끔, 기술에 대해 알 필요 없으니 무조건 상상의 나래를 펼치라고 강요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술은 마음껏 펼쳐놓은 상상의 나래를 최대한 실현시키는 역할이므로, 기술에 대한 선이해가 기획자의 상상을 제한한다는 논리입니다. 그 분들의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죠. 어떤 점에서는 일리도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기도 해요. 하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흔한 편견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봐.’ 와, ’20대 스포츠를 좋아하는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봐.’의 차이랄까요.

20대, 스포츠, 남성이란 키워드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제약이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이 상상력을 끌어내는 실마리죠.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나이, 연령과는 무관해!’라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만큼 난처합니다.

창조하는 법?
창조하는 법?

이런 분들은 기술에 대해 미리 알게 되면, 상상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줄 알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 거나 상상하는 건 애초에 망상이죠. 망상할 때, 의식의 흐름이 하나의 방향으로 잘 흐르던가요? 망상의 수준에서는 끈질기게 생각의 흐름을 하나의 결로 몰아갈 수 없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어떤 갈등도 없는 캐릭터를 설정해서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아요. 게다가 저런 논리라면, 작가가 기술에 대해 무지할수록 더 창의적인 Sci-Fi 소설을 쓸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잖아요. 훌륭한 Sci-Fi 작가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아주 높죠. 그래서 더 독창적이고 정교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피오트르 코발스키(Piotr Kowalski)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사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예술가의 상상력을 전혀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실재에 대한 지식이 많을 수록 상상력이 다룰 수 있는 것도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상상은 진공 속에서는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